이름: 거지태공망
2010/2/11(목)
안정효 선생님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출간한 안정효 선생

안정효 선생을 평일 오후 2시 이전에 만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평일 오전에서 오후 2시까지는 온전히 작업을 위한 시간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쓴다. 주말에는 휴식을 위해 강화도 낚시터로 떠난다. “벼락이 치는 날에도 주말이면 꼭 낚시터로 떠나. 낚시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있어도 항상 강화도로 떠나지.” 강화도에 있어도 마냥 쉬는 것만은 아니다. 원고 작업을 하지 않을 뿐이지, 머리와 손은 더욱 바쁘게 돌아간다.

구상 중인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메모한다. 그들과 나눴던 이야기 중에 소설 속에서 써먹을 만한 것도 모조리 종이에 받아쓴다. 소설집 『미늘』과 『미늘의 끝』 속의 생생한 낚시 묘사는 모두 이런 메모 덕분이다. 그렇게 쓴 메모들은 적당하게 분류되어 작품으로 씌어지기를 기다린다. 작품 활동의 든든한 예비군이다. 그것이 어떤 것으로 재창조될지는 작가도 모른다.

처음 습작을 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정효 선생은 문학과 생활 모두 엄격하게 관리를 해왔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첫 번째 작품만 내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60대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창작과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은 시간에 하는 프리랜서가 그 정도 자기 관리를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주인을 꼭 닮은 안정효 선생의 서재

서울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안정효 선생의 자택은 작업실을 겸하고 있다. 서재 겸 작업실의 한 구석, 커다란 책상에 컴퓨터가 놓여져 있고, 컴퓨터 앞에는 오전에 작업한 메모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책상 옆과 뒤에 놓인 탁자들에는 커다란 국어사전을 비롯한 참고 자료들이 쌓여 있다. 책상 옆 서가에는 지금까지 쓴 소설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벽에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The Silver Stallion)』의 영문판 표지를 확대한 판넬이 걸려 있다.

안정효 선생의 책상


창가에 놓여진 서가에는 대학교 때부터 읽은 영문 페이퍼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고, 표지는 너덜너덜했다. 책장을 넘기면 종이가 가루가 되어 푸슬푸슬 힘없이 부서졌다. 책을 펼쳐보니 밑줄을 긋고, 영어로 메모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20대부터 영어로 소설을 쓰려고 했기 때문에 영어 소설을 꼼꼼히 읽는 버릇이 들었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은 번역을 해서 작품의 구조와 문체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20대 때, 나는 연애도 안했어. 방학에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영어 소설을 읽고, 번역하고, 습작 원고를 썼지. 그때 하도 열심히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제는 무슨 책을 봐도 재미가 없어.”


안정효 선생의 번역서들이 꽂힌 서가

인상적인 것은 그동안 번역한 책들을 모두 꽂아둔 서가다.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한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 앨리스 워커의 『컬러 퍼플』, 어윈 쇼의 『야망의 계절』,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 150권이 넘는 번역서가 꽂힌 서가 앞에서 압도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성싶었다. 책의 권수도 권수지만 분야의 다양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번역을 하면서 소설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 소설가에게 가장 큰 재산은 경험인데, 실제로 경험하는 것보다 책에서 얻는 경험이 더 많거든. 그래서 일부러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번역하려고 했어. 어떤 문장에 대한 감각, 우리말에 대한 감각도 번역을 하면서 더 예리해졌고.”

더욱 놀란 것은 자료들을 모아둔 파일박스를 보았을 때다. 언젠가 쓰려고 하는 소설에 대해 20대부터 지금까지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생각날 때마다 쓴 메모들을 철해 두었다. 죽기 전에 꼭 쓰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에 대한 소설을 위한 자료는 20대 중반부터 모우기 시작했다. 꺼내 보여준 낡은 파일 안에는 오래 전에 복사한 영어 논문과 작품 구상 메모들이 들어 있었다. 안정효 선생은 “일흔 살이 넘으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전에 죽으면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며 웃었다.

서재와 주인은 닮는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재 안은 깐깐하면서도 낭비를 싫어하고, 일에나 생활이나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주인을 연상시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외에는 시간 낭비하는 것이 싫어서 사람도 많이 만나지 않고, 낚시도 단골 낚시터만 다니고, 약속 시간이든 마감 시간이든 이제껏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날 많이 어려워하나봐.”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면, 끝내라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까지 서가를 가득 채울 만큼 글쓰기에 대한 책은 많다. 그런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충실하다. 기초 다지기부터 집을 짓기까지 필요한 연장들을 준비해주고, 그것의 사용법까지 알려주는 책이다.

40 년 동안 글을 쓰면서 느낀 점과 터득한 노하우를 담은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선생이 아주 오래 전부터 쓰려고 마음먹은 책이었다. 대학 때부터 영어로 소설 쓰기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들, 영미권의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정독하면서 꾸준히 모아온 자료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작년 가을부터 집필을 시작했지만, 준비는 이미 40년 전부터 해온 셈이다.

“내가 처음 소설 쓰려고 공부할 때, 우리나라 책들은 대부분 문예사조나 작가의 사명 같은 것을 다루어서 실제 소설 쓰는 데 별 도움이 안됐어. 거기에 비해 영어권 책들은 굉장히 구체적인 것을 가르쳐줬지. 단어 선택에서 문장 쓰기, 이야기 틀 짜기까지 상세하게 다루었으니까. 그중 제일 열심히 읽었던 책이 루돌프 플레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The Art of Readable Writing)』이었는데 네 번 이상 숙독했고, 이번 책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인용했지.”

루돌프 플레시의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대목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면, 끝내라.’는 부분이었다.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글쓰기의 요령을 루돌프 플레시의 책을 통해 배웠다. “성격묘사 부분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 어떤 대상을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도 이 책에서 배웠지.”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글쓰기 방법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연장통이다. 비결이나 요령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책이다. 책은 시행착오와 실수조차 긍정한다. 경험은 작가의 가장 큰 재산이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병균의 침입을 받지 않은 사람을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선생의 그림 실력도 확인할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렸고, 가끔 신문의 시사만평을 그릴 만큼 그림 실력은 수준급. 만화뿐만 아니라 유화도 그리고 있다. 책에 실린 간결한 삽화들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다. 500쪽이 훨씬 넘는 책이지만 책장 넘기기가 수월하다면 그건 삽화 덕이다.

또, 스티븐 킹이나 로버트 러들럼과 같이 문학적 깊이를 가지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나 <오만과 편견>처럼 고전 작품으로 만든 영화들을 실례로 들어 글쓰기의 기법을 쉽게 숙지하도록 했다. 무엇보다 안정효 소설의 팬이라면 그의 소설이 어떻게 씌어졌는지를 엿보는 재미가 남다를 듯 하다.

글쓰기는 요령이 아니라 끈기다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을 위해 안정효 선생이 충고하는 것은 간단하다. 요령을 피우지 말라는 것. 요령은 절대 뚝심을 이길 수 없다. 뚝심과 끈기라면 안정효 선생을 따라갈 사람이 드물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무려 17년 동안 썼고, 『하얀 전쟁』은 10 년 동안 원고를 붙잡고 있었다. 20대부터 그토록 소망하던 영어 소설도 끝내 미국에서 출간됐다. 남들보다 데뷔는 늦었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을 쓰고 있다.

“내가 마흔일곱에 처음으로 미국에 갔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어 소설을 쓰러. 그때 미국에 살고 있던 대학 동기들이 나를 위해 환영파티를 열어줬지. 그때 한 친구가 ‘너 뭐 하러 미국 왔냐’고 해서 ‘소설 쓰러 왔다’ 그랬더니 ‘너 아직도 그 짓 하냐’ 그러더라구. 대학 다닐 때부터 영어 소설을 출판할 거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못했으니까. 근데 『하얀 전쟁』이 미국에서 출간되고 뉴욕타임즈에도 서평이 크게 실리니까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 나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웃음)”

20년이 넘게 준비해 미국에서 소설을 출판한 셈이다. “그때 나를 담당했던 편집자가 ‘성공하려고 준비 한다’라고 말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글 쓰려고 하는 사람들 주변에 참 많지만 다들 성공할 때까지 버티질 않는 것 같아. 원고는 10장도 안 쓰고 사인 연습을 하는 형국이랄까.(웃음) 나는 소설가로 늦게 데뷔했지만 그만큼 충실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 올해도 중편 하나 썼지.”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도 엄격하다. “다른 장편이나 중편들은 다 괜찮은 수준이었는데, 『헐리우드키드의 생애』가 많이 못 미친다고 생각해. 그 작품은 신변잡기,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수준이지, 문학성이나 주제는 『미늘』 같은 중편에 못 미쳐.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를 쓰고 나서 한동안 작품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보통 한 작품에 10 년 이상 준비를 해서 쓰는데 그 작품은 그러지도 못했고. 그래서 한동안 작품을 안 썼지.”

작가는 발과 엉덩이로 글을 쓴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누구도 쫓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 20대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해온 것이니까. 일단 해온 양만 봐도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단행본 원고를 쓰는 와중에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영화 대사를 사전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하루에 영화를 3~4편씩 보면서 좋은 대사를 수집하고 있다고. “지금까지 3000편의 영화에서 대사를 뽑아냈지. 지금까지 모아둔 것만 해도 플로피디스크 10장이야. 1년 정도 더 작업을 해서 책으로 낼 생각이지.”


작품 구상에 필요한 자료와 아이디어를 가지런히 모아둔 파일박스

이렇게 작업하는 사람은 따라갈 수 없다.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시시때때로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로 남겨 파일로 정리해 둔다. 서재 한 구석에 있는 파일서랍에는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차곡차곡 모아둔 자료와 아이디어 메모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걸 다 쓰고 갈지는 나도 모르겠어.”

자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언제나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본 것, 들은 것, 생각한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것을 주제에 따라 파일로 분류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고. 몇 십 년 동안 방대하게 축적된 자료들과 아이디어들이 철저한 프로페셔널한 자세와 함께 안정효 선생의 최대의 무기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好之者 不如樂之者)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 안정효 선생에게 딱 맞는 말이다. 예전 근처에 살던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안정효 선생에게 ‘일을 만들어서 하는구나’ 라고 핀잔을 줄만큼 안정효 선생은 일에 몰두해 살아간다.

“70이 넘어서도 계속 글을 쓸 생각이야. 마흔 이후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 위해서 먹을 것 이상은 돈 벌지 않겠다고 각오했지. 그때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어. 좋아하는 글 쓰고, 좋아하는 작품 번역하고, 낚시도 가고,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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